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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이면서 동시에 실제 의미를 두고 항상 논쟁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는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검찰개혁을 두고 이 논쟁이 치열했다. 이번 칼럼은 2020년대의 여덟 가지 테마 중 네 번째로 법치주의를 다룬다.

민주당발 검찰개혁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건 그 개혁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법이 아니라 집권 세력에게만 유리한 법을 만들려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필두로 한 여당 정치인들의 내로남불’(법적, 규범적 이중잣대)은 이런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집권 세력의 영향권에 있는 경찰과 공수처가 별다른 견제 장치도 없이 검찰의 권한을 가져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법학에서는 집권 세력이 자신에게 유리한 법을 사용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법치주의라 부르는 건 법의 지배(rule of law). 법의 지배는 비인격적 지배의 한 형태로 특정 사람(집단)의 자의적 판단이나 관계에 따라 국가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규칙에 따라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을 만들고(입법), 법을 집행하며(행정), 법의 위반을 처벌하는(사법) 모든 게 법치주의의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입법부 구성원과 행정부 대표를 공정한 선거로 선출한다.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지향이기 때문이다. 인치 대신 법치를 하는 것이니 그 법을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대리인이 만들고 집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라 하겠다.

다만 사법부는 선거로 선출하지 않는다. 근대 법치주의의 선구자인 몽테스키외는 참주정의 위험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관계자의 협상에 따라 법이 해석되고 위법 여부가 바뀌면 법은 공평함과 권위를 잃는다. 모두가 힘으로 정당성을 찾으려는 혼란이 발생한다. 그런데 혼란이 커지면 시민들은 사회 존속을 위해 나쁜 의미의 안정성이라도 찾게 된다. 즉 참주를 선택하며 민주정을 스스로 포기한다. 몽테스키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실제 사례를 찾아냈다. 그래서 그는 참주정을 막기 위해 사법부는 엄격하게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정에서 종국적 판결은 법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주권을 가진 시민에게 있지만, 종국적 판결의 오남용이 가져오는 파국을 막으려면 더더욱 사법부의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국가와 법의 소멸을 지향했다. 역사적으로 생산력 발전과 함께 사회적 잉여생산물(또는 잉여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 폭력을 보유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 잉여를 차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결과가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계급사회의 상위에 자리 잡은 소수를 보호하고, 하위에 버려진 다수를 폭력으로 지배하는 통치위원회. 법은 그 소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형식적으로만 중립적인 규칙일 뿐이다. 그래서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스스로 통치하는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와 법이 모두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소련을 비롯한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은 이러한 소멸과는 거리가 멀었다. 법의 지배를 공산당의 지배로 바꿨을 뿐이기 때문이다. 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법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 또는 사회주의 완성을 위해 복무하는 법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수임자인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위해 얼마든지 법을 초월할 수 있다. 법원도 존재하긴 했다. 다만, 법관은 당의 방침을 따르는 충실한 당원이어야 했다. 그래서 사법은 당을 방침을 위반하는 행동을 처벌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사적 재산권과 시장의 규칙을 정하는 민법을 여럿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법은 중국공산당의 경제 정책의 수단일 뿐이고, 공산당의 지배는 여전히 법 위에 존재한다.

국가와 법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의 이상은 현실 사회주의에서 이렇게 역행했다. 국가는 소멸한 게 아니라 더 강력해졌고, 법 또한 소멸한 게 아니라 국가와 일체가 된 공산당의 통지 도구가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오류는 지향을 달성하려는 도구로 법을 이용했던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예로 러시아혁명 이후 만들어진 사회주의 법들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완수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반혁명 도전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유주의 법이 보편적 개인의 자유와 권력의 규제를 위해 만들어진 것과 반대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국가와 법을 도구로 삼는 한,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에 닥칠수록 그 도구의 힘을 더 빌릴 수밖에 없고, 그 도구는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리바이어던으로 진화한다.

-법치주의라는 사회주의의 도전이 실패했다고 현대의 법치주의가 정답이란 것은 아니다. 선진국 대부분에서 입법부는 포퓰리즘 도전에 직면해 있고, 경제적 불평등을 재산권의 철칙으로 보호하는 법의 권위는 지속해서 추락 중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존하는 법치주의가 계급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복무한다는 점은 점점 더 분명하게 시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가 위기에 처한 지금, 법치주의도 토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법치의 목표인 개인적 자유의 실현은, 앞선 칼럼(41일자 <자유에 대해>)에서 살펴봤듯,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라는 조건에서만 부족하게나마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민은 법치주의의 결함과 반-법치주의의 실패 모두를 지양하는 변화에 나서야 한다. 기본 방향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같은 시민의 자주적 조직을 강화하며 스스로 여러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조직과 규범을 만들어 가는 것이 법치의 측면에서도 법의 오남용을 막는 방법이다. 법치의 진보가 더 많은 법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참고로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법치주의는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법을 도구로 삼아 적폐청산에 나서더니, 이제는 그 법을 무기로 집권 세력의 안위를 도모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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