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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군부독재를 끝내는 문민화였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과제는 무엇일까? 민주주의 수준을 높이는 선진화라 할 것이다. 한국 정치에는 문민화 이전의 악습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2016년 터진 박근혜 게이트는 이를 단적으로 폭로한 사건이었다. 경쟁을 제한하고, 특권을 이용하는 지대 추구의 정치는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과연 박근혜 탄핵 덕에 집권한 현 정부는 이를 얼마나 어떻게 개혁했을까?

이번 칼럼의 주제는 2020년대의 여덟 가지 키워드 중 다섯 번째인 민주이다. 민주정은 통치권이 대중에게 있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통치권이 세습되는 군주에게 있으면 군주정, 신분적 특권을 가진 소수 집단에 있으면 귀족정이라 부른다.

민주정은 국민의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데 효과적이다. 민주정에서는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리인들이 법을 만들고 법의 집행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입법, 행정의 대리인들은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교체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나 특정 소수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들고 집행하면, 다수가 선거로 그를 교체한다. 공권력을 이용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 들 때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은 재선을 위해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사회적 이익을 최대화하려 노력해야 한다.

다만 민주정은 주인-대리인 문제를 피하지 못한다. 주인(주권자)인 국민이 뽑은 대리인(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입법과 행정에 관해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입법과 행정에서도 비용과 편익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대리인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이득을 챙길 여지가 커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합리적 이성과 함께 비합리적 믿음을 유지하는 존재이기도 해서, 정치인이 이를 악용할 수 있다. 지역주의나 반공주의 같은 게 대표적 사례다. 비합리적 믿음으로 선출된 대리인은 당연히 자신만을 위해 일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민주정이 발전하는 과정은 여러 제도를 통해서, 그리고 국민의 지적 윤리적 성숙을 통해서 주인-대리인 문제를 줄여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군주정은 주인-대리인 문제로만 보면 민주정보다 효과적으로 국민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를 보장할 수도 있다. 주인-대리인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철인 또는 성군이 통치하는 것인데, 세습되는 군주 중 폭군이 나오는 경우 대책이 없다는 게 결정적 한계이다. 사실 군주가 성군이 되어야 할 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군주는 성군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보다 특권 계층과 나눌 수 있는 지대에 당연히 이끌린다.

한편, 마르크스는 두 가지 점에서 근대의 민주정을 비판했다. 첫째, 민주정이 계급사회를 재생산하는 정치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경로의존성이라 부르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경로의존성은 현재의 인간은 과거의 제도와 문화를 통해 지식과 관습을 익히기 때문에, 선택 가능한 미래의 변화 역시 과거의 제도와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이론이다. 예로 토지 위에서 자란 농산물을 지주가 가져가듯, 공장에서 생산된 노동생산물을 공장주가 가져가는 게 자연권으로 인정된다. 대중은 이런 경로의존적 제도와 관습 속에 있다. 그래서 다수결이 통치 원리가 되는 민주정에서는 경로의존성이 관철될 수밖에 없다. 민주정은 계급사회를 부드럽게 재생산하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유구하게 이어진 계급사회의 유산에서 벗어나려면, 근대의 피지배계급인 노동자계급이 변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정이란 이름의 부르주아 독재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뒤집는 게 바로 그 변혁의 핵심이다.

둘째, 국민 주권이 형식적으로 보장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 다수가 평등하게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민주정에서는 형식적으로 11표라는 평등이 주어지지만, 정치적 발언권은 철저하게 불평등하다. 경제적 능력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정치인을 매수하는 금권정치가 대표적이다. 경로의존적 제도로 말미암아 학교나 가족에서 이뤄지는 교육 역시 전통적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내용으로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피지배계급이 국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 사회운동과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고, 해결하는 문화를 성숙시키는 것이 진정한 민주정을 건설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런 대안은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산당의 일당 독재로 타락했고, 자주적 사회운동과 직접 민주주의 역시 당의 지배 속에서 질식해 버렸다. 마르크스의 비판이 타당하더라도 그의 대안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작동하지 못했다.

물론 근대 민주정 역시 궁극적 대안이 된 것은 아니다. 특히 21세기 이후 선진국의 민주정은 큰 위기에 빠졌는데, 정치에서의 주인-대리인 문제가 새로운 양상으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포퓰리즘이 바로 그 원인이다.

포퓰리즘은 간단히 말해 을 하는 정치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주로 기득권 세력을, 우파 포퓰리즘은 보통 인종을 그 의 대상으로 삼는다. 좌파든 우파든 포퓰리즘은 민주정의 주인-대리인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왜냐면 그 대상을 절멸시키는 게 민주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심지어 이 과정에서 주인과 대리인이 융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퓰리즘 정치는 국민 내부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키우고, 정치 지도자의 열성 지지자를 모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트럼프의 인종주의 정책과 열성 지지자들의 의회 습격 사건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였다.

한국에서도 21세기의 민주정은 포퓰리즘 탓에 선진화에 실패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정치와 열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 캠페인이 단적인 상징이다. 한국 민주정의 선진화 과제는 제왕적 대통령과 무능한 의회의 조합이 만드는 주인-대리인 문제였다. 하지만 현 정부는 이를 해결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결정적 변화는 과거의 유산과 단절할 각오가 되어 있는 피지배계급이 자주적 사회운동을 통해 지속해서 달성하는 것일 터이다. 민주정의 선진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노동자운동 진영에서 진지하게 토론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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