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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이 몇 년째 논란이다. 전통적 공정성이 강자에 의한 약자의 배제를 주로 다뤘다면, 최근의 공정성 논란은 강, 주류소수 관계없이 나와 주변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는 듯 보인다. 이번 칼럼은 2020년대의 여덟 가지 키워드 중 여섯 번째인 공정을 다룬다. 최근 유행하는 공정성 담론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는 반-능력주의 담론의 결함을 살펴본다.

공정성은 개인이 받는 보상의 차이가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봉건 사회에서는 신분이나 신의 은총이 기준이었다. 하지만 신분과 신을 타파한 근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그 기준이 된다. 개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기여만큼(다른 말로 하면 실적만큼) 보상받는다. 이것이 바로 근대의 세계관이라 할 실적주의(meritocracy). 능력과 기여, 기여와 보상 사이의 연결은 시장 경쟁이 담당한다. 경쟁적 시장은 해야 할 일에 필요한 능력을 배분하고, 일의 결과에 따라 응분의 몫을 분배하는 최적의 장소다. 근대의 공정성은 기본적으로 시장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 상태는 현실에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독점이나 정보를 이용한 지대(rent) 추구가 모든 시장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대는 다른 이의 기여를 합법적으로 빼앗는 것이다. 문제는 지대와 실적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하면 지대가 실적을 압도하여 둘의 지위와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화폐, 주식, 부동산 같은 자산을 소유해 이득을 얻는 것이 재화와 서비스를 실제로 생산해 얻는 이득보다 커질 때, 사람들은 기여를 통해 응분의 몫을 얻는 것보다 소유 자체가 가져다주는 손쉬운 지대 추구에 더 몰입한다.

지대가 실적으로 둔갑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아예 실적주의 자체를 거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마이클 샌델은 능력이 유전적 또는 태생적 운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공정한 경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공정한 경쟁이 없으니 실적에 따른 보상의 차이도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애국심 같은 공동체 의무를 모두가 가진다면, 경쟁 대신 추첨제를 보편화할 수도 있을 것이라 제안한다.

하지만, 운칠기삼(또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근거로 한 공정론 비판은 현실에서 무력하다. 예로 사람들은 능력 좋은 요리사가 있는 식당을 선호하며, 그에게 더 많은 소득을 가져다주는 선택을 옳다고 여긴다. 나의 경쟁과 직접 관련되는 부분에서는 능력주의가 불공정하다고 비판할 수 있어도, 나의 경쟁과 무관한 선택지에서는 능력이 공정의 기준으로 선호된다는 것이다. 실적, 기술, 재능 등을 무시하고 모두가 골고루 결과를 공유하자는 주장은 무임승차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 무능은 편익을, 유능은 비용을 치르는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샌델의 경우 애국심같은 공동체 의무를 강조하는데, 이는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개인적 실적주의와 사회의 평등을 이어보려 했던 철학자는 존 롤스였다. 그는 인간이 사회를 만드는 계약을 맺을 때 원초적 입장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원초적 입장은 나와 상대방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태(무지의 베일)에서 맺는 계약인 바, 사람들은 내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해 가장 공정한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공정성은 사회계약 유지의 토대가 된다. 정의가 사회의 존속(즉 계약의 유지)을 위한 규범이라면, 공정이 곧 정의인 셈이다. 롤스는 모든 경쟁에서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는 규칙, 권력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사회 전체와 사회의 가장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증가시킬 때만 정당하다는 규칙(차등분배) 등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이야기했다.

근대적 세계관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애덤 스미스는 정의(justice)와 공정(fairness)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롤스와 같은 이야기를 경계한 것이다. 정의는 타인의 분노에 공감하는 인간 본성에 대응하는 규범이다. 사회가 분노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분노에 공감하는 구성원들이 원한을 축적하고, 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그래서 사회가 당사자들을 대신해 처벌과 보상을 하고, 구성원들이 원한을 축적하지 않도록 하는 게 바로 정의다. 공정은 질투, 허영 같은 인간 본성에 대응하는 규칙이다. 이런 본성은 인간이 희소한 자원을 더 얻기 위한 경쟁에 나서는 원동력이 된다. 이때 경쟁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경쟁 규칙, 사회 전체의 풍요를 증진할 수 있는 경쟁 규칙이 바로 공정이다. 공정한 경쟁은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자신과 공동체의 풍요를 증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스미스는 정의와 공정이 각각 다른 인간 본성을 상대하는 것이니만큼,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왜냐면 공정한 정의는 정의란 명분의 법을 이용한 독재가 될 수 있고, 정의로운 공정은 공정이란 명분의 독점(지대 추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 관점에서 보면,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차등분배를 강요하는 정치적 독재로 귀결되거나, 기회 균등과 차등 분배 모두 실현하지 못하는 무능한 도덕이 될 뿐이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공정성 논란은 애덤 스미스의 공백을 채우는 방향에서 해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본질은 실적(merit), 숙련(ability), 잠재력(capability) 같은 광의의 능력이다. 개인이 가진 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지대(rent)와 실적을, 지위(position)와 숙련을, 세습(과 잠재력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불공정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이라 할 것이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이런 결함의 원인이 임금노동제와 사적 소유제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불공정을 비판하며 지대에 동참할 권리, 지위로 갑질할 권리, 자원을 세습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준석 씨나 공공기관 정규직의 공정론이 딱 이렇다. 반사회적 위선을 공정이란 명분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반능력주의는 이런 위선에 대한 반작용인데, 능력의 차이를 부정하고 균분주의를 택하자는 식의 대응은 현실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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