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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의 요구가 모두 실현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무엇보다 가장 분명하게 바뀌는 건 정부일 것이다. 일자리, 소득, 교육, 보험, 건강, 돌봄, 양육, 자연, 심지어 기간산업까지 정부가 책임지니 말이다. 전지전능한 정부가 탄생한다. 이번 칼럼에서는 2020년대의 여덟가지 키워드 중 마지막인 정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장의 실패를 강조하며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현대화폐이론(MMT)은 정부의 무한한 발권력을 이용해 완전고용을 이루자고 주장한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면 생태-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투자와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가형 국가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모두 결정적 결함이 있다. 현대화폐이론은 기축통화국이 세계적 경제침체 속에서 실행한 비전통적 양적완화를 영구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화폐와 재정에 관한 이론에 문제가 있다. 탄소배출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위해 시장 대신 정부의 계획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탄소 감축을 강령으로 한 중국공산당을 한국에 만들자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가형 국가는 유능한 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생략한다. 특정한 성공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란 것이다.

전지전능한 거대 정부는 역사적으로도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 정부가 실패하면 속수무책이다. 정부 실패란 정부의 잘못된 결정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거나, 정부가 부패하여 자원이 크게 낭비되는 상황을 말한다. 민간의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피해 복구가 어렵다. 소련은 1970년대 닥친 경제위기를 정부와 당의 명령으로 해결하려다 국가가 아예 붕괴했다. 1950년대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로 불리는 정부의 포퓰리즘적 팽창으로 곤욕을 치렀다. 2010년대 남부유럽은 팽창한 사회복지 재정을 개혁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로 인해 국가부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둘째, 강력해진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강력한 정부는 단지 재정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이해를 공유하는 관료집단 또는 공공부문을 동원할 수 있고, 심지어 시민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정보도 독점할 수 있다.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 중국공산당이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자유 시장과 높은 소득 수준을 자랑하는 싱가포르는 정부가 주택부터 교육까지 일체를 책임지지만, 정치 권력은 독점되어 있고, 언론 자유도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다. 전근대적 체벌형도 이뤄진다.

신제도주의 경제학은 민간이 잘 조직되어 있어야 덜 실패하는 정부,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정부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정부여야 더 많은 역할을 효율적으로 맡을 수 있다. 이 이론에서 핵심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 노조 같은 민간의 조직적 역량이다. 여기가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기업,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사회 변화 방향을 제시하는 노동조합이 있어야 정부도 폭주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제도주의는 정부의 역할이 민간의 조직적 역량이 커질 때 그 방향을 제한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정부와 민간의 균형만 강조할 뿐, 정부의 계급적 속성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사회에서 정부의 기본 속성은 지배계급의 통치위원회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분업을 조직했고, 이 분업을 위한 인간관계가 바로 사회이다. 그런데 사회적 분업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그 결과인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때 타인에게 물리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폭력을 보유한 사람 또는 집단이 우위에 선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을 통한 위계 관계는 주인-노예, 지주-소작농, 자본가-노동자 등으로 생산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지배와 피지배라는 계급 관계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다. 정부는 가장 강력한 폭력(군대)을 보유하며, 지배계급 사이의 동맹을 매개한다. 그리고 피지배계급이 계급 관계를 뒤집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공화정 또는 민주정이라 불리는 현대의 정부에서는 지배계급의 통치위원회라는 정부의 속성이 희석된다. 정부의 폭력은 법에 기반해야 하고, 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대표자들은 시민의 투표로 선출된다. 대표자는 재선을 위해서 형식적으로라도 다수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물론 행정부, 입법부의 대표와 고위직을 차지하는 정부 관료들은 사상적으로나 이해관계로나 지배계급의 일원이다. 그리고 반대로 피지배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노동자가 다수라고 노동당이 집권당이 되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현대의 정부는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는 지배계급의 통치위원회라 하겠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노동자운동의 목표는 노동조합 또는 협동조합을 통해 시장과 국가의 역할을 줄이고, 스스로 생산하고 분배할 수 있는 노동자 다수의 역량을 증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급 사회를 궁극적으로 지양하는 방법이다. 국가를 어떻게 하는 것 이전에, 노동자계급 자신의 지적, 윤리적 역량을 키우는 게 운동의 목표라는 것이다.

20대 대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대통령 예비후보들은 각종 기본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부동산, 복지 등 정부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들에게 대통령은 시민 요구의 해결사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 뒤질세라, 정부가 더 많은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과잉 정부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현대 자유주의 관점에서도 진보적이지 않은 것이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은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넓히기 위해, 요구와 투쟁을 다양하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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