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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한 건 지극히 최근의 현상이었다. 매디슨 프로젝트 추정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1인당 GDP로 측정한다)95%는 최근 200년 사이 이룬 것이다. 4대 문명이 세워진 것이 대략 5천 년 전이니, 인류는 48백 년 동안 현재 풍요의 단 5%만 이뤄냈던 셈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성장의 위대함이다. 그런데 최근 이 성장에 문제가 생겼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전반이 장기 저성장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코로나 경제 침체로 저성장 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이번 칼럼에서는 지난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2020년대의 여덟 가지 키워드 중 두 번째, 풍요 또는 장기적 경제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로버트 고든은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에서 20세기 성장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20세기 초중반은 전기, 내연기관, 석유화학, 제약, 철도, 항공, 상하수도, 가전 등 현대의 거의 모든 것이 탄생했던 시기였다. 최근의 인공지능 디지털 기술은 20세기 기술의 응용이자 부분적 확장에 불과하다. 모든 걸 바꾸는 산업혁명, 그리고 그만큼의 대단한 경제성장은 이제는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고든은 세계가 이제부터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도성장을 재개하는 방법이 아니라 저성장이 심화하지 않도록 막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장기 저성장이 착시 효과 또는 기술 격변기에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4차 산업혁명론의 원조라 할 2의 기계시대저자 에릭 브린욜프슨앤드루 맥아피는 가격을 토대로 한 GDP 측정 방식이 가격 없는 서비스가 많아지는 디지털 경제에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또한 1차 산업혁명 직후인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장과 제도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생산성 정체가 나타났던 것처럼(엥겔스의 휴지기라고 부른다), 4차 산업혁명 역시 시장과 제도가 준비되기 전에는 정체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주의 전통에서 저성장의 원인을 유효수요 부족에서 찾는 경제학자들도 많다.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해 소비 수요가 감소했고, 디지털 경제 확대 등으로 투자 수요도 감소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이는 단기적 경기 변동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 흐름이다. 당장 해결이 쉽지 않다. 정부는 장기 불황에 대비하면서 수요를 창출하는 정책을 지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참고로 미국 바이든 정부의 유례 없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은 이들의 이론이 근거이다.

한국의 저성장과 관련해서는 다음 두 주장이 주목할만하다. 베리 아이켄그린드와이트 퍼킨스신관호가 공저한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한국경제가 서비스업 생산성 향상에 실패해 고소득 경제로 도약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제조업 대기업의 기술 모방과 대규모 투자로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이런 추격성장은 이제 한계에 부닥쳤다. 세계적 선도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하려면 제조업의 성장 속도는 크게 둔화할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도 이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한국의 심각한 문제는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다. 생산성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볼 때 턱없이 낮아서다. 이들은 서비스업 규제개혁에 성공해야 고소득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종린베리 와인개스트가 공저한 한국발전론은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한국의 성장 지체를 분석한다. 경제가 지속해서 성장하려면 사회적 분업이 고도화되고, 경쟁이 여러 부분에서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권리와 자원에 대한 접근이 개방적인 곳에서 이런 사회 질서가 가능하다. 선진국이란 다름 아니라 이런 개방적 접근 사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한국은 해방 후 개방적 접근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데, 다만 문민화 민주화 이후 정체가 이뤄지고 있다. 재벌 그룹과 대기업공공부문 노조가 공정한 경쟁 대신 지대 추구를 계속하고 있어서다.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재벌과 노조, 양쪽의 개혁이 동시에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일반적이며 필연적 결과로 저성장을 설명한다. 개별 기업의 기술혁신과 자본투자가 단기적으로는 선도 기업에 특별한 이윤을 가져다주지만, 기술이 보편화되고 자본투자 경쟁이 심화하면 장기적으로 전체 기업의 수익성을 하락시키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하락하면 투자와 고용이 감소해 국민경제의 성장이 정체, 하락한다. 기술이 보편화하고 투자가 전반적으로 증가해도 전체 기업의 수익성이 하락하지 않는 기술과 제도의 대대적 혁신, 즉 산업혁명이 있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산업혁명은 자주 나타날 수 없다. 산업혁명 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자본주의적 성장의 모순이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윤을 위한 경제를 필요를 위한 경제로 전환하지 못하면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앞서 본 로버트 고든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과 친화적이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적 성장의 모순을 20세기 기술혁신의 독특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우회하여 설명했을 뿐이다. 4차 산업혁명 낙관론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증명되지 않는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산업혁명에 동반하는 생산성 급상승과 투자 증가는 세계 어디에서도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 유효수요 부족 이론은 수요 부족의 이유가 바로 이윤율 하락의 결과라는 점을 간과한다. 케인스주의적 해법은 오늘날 보고 있듯 정부 부채의 증가로만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중진국 함정을 규제개혁으로 돌파하자는 신고전파 성장론은 그 규제개혁의 결과가 시장독점의 확대나 지대 추구로 이어지는 제로섬 게임이란 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미국에서 제조업 리쇼어링이 강조되는 이유를 떠올려 보면 이해될 것이다. 정치경제론은 중진국의 접근 제한 질서가 가지는 문제점을 잘 설명하지만, 정작 개방적 접근 사회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선진국에서 왜 경제 사회적 위기가 심화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는 이윤율 하락 법칙을 수용해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풍요는 임계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 이론이 가진 결함과 공백을 해결하는데, 마르크스의 통찰력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속 가능한 풍요를 추구하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기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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