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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오래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말했다. 좋은 손님은 비슷한 이유로 착하다. 예의를 지키고 제값을 잘 치르고. 그런데 나쁜 손님은 오만가지 다른 이유로 ‘진상’이다. 막말하는 사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바꿔 달라는 사람, 상품에 관한 자신의 철학과 경험을 일장 연설하는 사람,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사람, 문이 부서지도록 꽝 닫고 가는 사람, 느닷없이 고소하겠다는 사람, 주차하는 데 고생했으니 물건값을 깎아 달라는 사람, 가게와 무관한 자신의 사연을 밑도 끝도 없이 하소연하는 사람 등등.

그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한편의 철학으로 엮어서 설명했다. 인간사의 진리는 선행이 아니라 각각의 악행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착함만 있다면 인간사는 얼마나 지루하고 단순하겠는가. 진상 속에 나타나는 개성의 발현, 감정의 다양성, 인간관계의 다이내믹스야말로 인류가 다양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착한 사람보다 진상인 사람을 안주로 삼아야 술자리 대화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이지 않겠는가.

따져 보면 내 친구가 푼 썰은 개똥철학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 사회과학의 대부라 할 애덤 스미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 감정의 핵심이 공감이라고 주장한다. 공감은 내가 어떤 타인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나도 그와 비슷한 감정이 생길 것 같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공감 능력이 있어서 인간은 유대감을 가진 집단, 즉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떠올려 보면 그 이유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슬픔과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다 보니 타인에게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줘도 자책하지 않는다. 부정적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서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 될 수 있고, 서로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집단을 만들 수 있다. 행복이나 희열 같은 긍정적 감정에 대한 공감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고 사회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 나의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진상인 사람들에 대해 함께 분노할 수 있어서 밤새도록 술을 먹으면서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관계, 즉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진상 철학’보다 더 심오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부정적 감정에 대한 공감은 사회를 만드는 토대지만, 동시에 사회를 무너뜨리는 힘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슬픔과 분노가 해소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누구를 원망하는 응어리진 마음, 즉 원한이 쌓이기 때문이다. 원한은 복수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로 이어진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발발한다.

그래서 스미스는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는 것이 정부의 핵심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사회에 원한이 축적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바로 정의다. 슬픔과 분노를 야기한 행동을 공정하게 처벌하고, 가해자가 적절하게 배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 사적 관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법으로 공정함과 적절함을 보장해야 한다. 정부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영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영웅이 사적으로 복수를 대행하게 된다. 그런데 영웅도 인간인지라 친한 사람부터 챙기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처벌 수위도 천차만별로 정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시민들도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복수에 맞서 복수를 하는 반 영웅, 조커도 나타난다. 원한을 예방하고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주체는 불편부당하게 법을 집행하는 폭력의 독점자 정부여야 한다.

대통령 선거 경쟁이 점점 더 가열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이전과 많이 다른 것 같다. 정책이나 지향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과와 가족을 둘러싼 의혹만 쟁점이 되고 있어서다. 말하자면 누가 덜 비호감인지를 겨루는 사상 초유의 ‘진상’ 경쟁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주변에서 보면 한쪽이 대안이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저 후보가 더 진상이라 이 후보를 지지한다는 식이 대세다. 언론 보도나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는 ‘분노 지수’도 대단하다. 당연히 이런 분노는 정책에 대한 호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 후보가 정말로 싫어서 생기는 감정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처럼 술자리 안주로는 최고라 하겠지만, 스미스가 우려했던 원한의 축적이란 점에서는 최악이라 하겠다.

보통의 경우 선거가 끝나고 나면 네거티브 경쟁으로 쌓였던 감정도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래서 새 대통령은 임기가 시작되면 반년 내에 절반 이상의 지지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20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선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정치적 분노가 선거 이후까지 겹겹이 쌓여서 새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거나, 양대 진영의 정치적 복수가 이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정부가 분노를 승화하는 제도가 아니라 원한을 증폭하는 매개체가 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은 보통 내전 중인 나라에서 발생한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대통령 선거에서 분노라도 해소하라는 의미로, 마이너스 투표권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한 표는 기존대로 1표, 또 한 표는 싫은 사람에게 마이너스 1표로 투표하는 것이다. 당선자는 합산해 순 득표수가 많은 사람이다. 비호감 경쟁이란 현 선거 상황에도 어울릴 것 같고, 정말로 싫어하는 상대 후보에게 마이너스 1표를 선사해 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고. 얼마 전 내가 이런 아이디어를 페이스북에 썼더니 한 친구가 댓글로 “그러면 허경영이 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반문하기도 하던데,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비호감 전쟁의 최후 승자는 의외로 무념무상의 광대 또는 현세를 초월한 광인일 수 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 정치도 어쩌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마이너스 투표는 물론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한국의 상황을 되돌아보자고 한 이야기다. 정부와 대선 유력 후보들이 시민의 정치적 분노와 슬픔을 줄이긴커녕 도리어 키우고 있다. 시민 스스로가 감정을 잠시 추스를 때인 것 같다. 이래서는 대통령이 누가 돼도 한국 사회가 원한에 집어삼켜져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 저자 (jwhan77@gmail.com)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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