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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으로, 특히 이재명 캠프로 노동계 인사들이 몰려가고 있다는 기사(참조).

이들이 변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은 '노동존중'이라는 문재인의 말을 참으로 좋아했다. 얼마나 반겼는지, 정부를 비판할 때도 "노동존중 약속을 지켜라", "노동존중 시대에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따졌다. 민주당 대선 캠프로 가는 전현직 민주노총 간부들은 이재명이나 이낙연이 노동을 더 존중해 줄 것이라 믿는 것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자기 스스로의 일이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확실히 마르크스는 19세기 계몽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진리를 깨닫고, 규범을 진일보시키는 집단이 시대를 선도하며 무지한 민중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다만, 마르크스는 사적 이익에 사로잡혀 세계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없었던 부르주아지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대을 걸었다. 피해자 노동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스스로를 재조직할 수 있는 노동자, PT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래서 이렇게 일갈했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혁명적이라 함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곳간에 불을 지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적 윤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부르주아보다 앞선다는 의미다.

2천 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은 어느 순간부터 주인되기보다 존중받기에 열중했던 것 같다.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노동운동 내부에서 연대를 모으기 위해 누가 더 비참한지 경쟁을 벌이는 모습도 자주 나타났다. 1987년부터 이어져 온 전투적 조합주의는 전략적 사고 대신 도덕적 판단을 신성시했다. 처절한 투쟁에 몰빵하는 걸 감히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절대선으로 만들어놨다. 그런데 비참한 사람,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존중'과 '보상'이다. 비참해질 수록, 존중해 줄만큼 힘이 있는 권력, 보상해줄 만큼 넉넉한 곳간이 중요하다. 2천년대 노동운동이 찾아낸 권력은 민주당이었고, 곳간은 재벌과 공공부문이었다. 민주당 눈에 띄기 위해 투쟁했고, 비정규직도 재벌과 공공부문에서 주로 조직했다.

노동존중을 받기 위해 민주당으로 간 사람들에게 아무리 비난을 퍼부어본들 변하는 건 없다. 민주노총에서 이들을 비난하는 서명운동도 했다는데, 내 생각에는 초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존중받기를 원하면서 정의당, 진보당, 노동당에 기대어 있는 게 더 이상한 거다. 나는 노동존중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노동운동, 마르크스처럼 말해 혁명적이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노동운동이 민주당의 파트너가 되어 실리를 추구하고 존중을 갈구하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이를 두고 반대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게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더 이상하다.

원망할 일이 아니라 환멸(幻滅, 환상이 깨어져 느끼는 속절없는 마음)을 느껴야 할 일이다. 복수를 다짐할 일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회환(悔恨, 뉘우치며 한탄함)에 잠겨야 할 일이다.  원망과 복수를 지양하고, 환멸을 더 철저하게, 회한에 더 푹 잠기는 것이다. 이게 오늘날의 사회운동가들이 86정치인 같은 최악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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