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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의 포퓰리즘 비판과 딜레마 

1. 용어

Populism의 Pop~과 Democracy의 Demo~ 사이 구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op은 선호 또는 감정을 가진 대중을 뜻하고(예. Pop music), demo는 양적 집단으로 대중(예. 인구통계학 demographics)을 의미한다. 참고로 폴리비오스는 주권자의 숫자를 기준으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나눴다. populism은 대중 감정을 우선하는 정치를, democracy는 인구 다수가 주권을 가진 정부를 지칭한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populism을 인민주의로 번역하는 건 약간의 오해 소지가 있다. 인민은 전통적으로 people을 지칭한다.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가 예다. 인민은 동맹을 맺은 피지배계급이며, 역사적으로는 노농(勞農) 동맹의 의미했다. pop의 의미와는 거리가 꽤 있다. pop과 친화적인 건 people보단 오히려 ‘mob’(폭민)이다.

이런 점에서 populism 번역은 포퓰리즘을 쓰던지, 아니면 ‘여론의 지배’ 같은 풀어쓴 말을 사용하는 게 낫다.

2. 포퓰리즘 비판의 대상은?

포퓰리즘이란 개념은 광의의 정치적 ‘경향’을 지칭한다. 반-엘리트(기득권), 구원자 같은 지도자, 제도적 해결 방식에 대한 불신, 정적에 대한 악마화, 미디어 선동, 대중적 감정에의 호소 등등. 하지만 이런 정의는 개념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 선거 정치가 핵심에 있는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포퓰리즘 경향이 ‘정도의 차이’만 있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여론 경쟁 과정에서 위에서 예시로 든 정치 성향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은 대의 민주주의 정치 전반에 걸쳐 있는 어떤 부정적 경향을 지칭하는 다소 일반적 의미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토크빌과 J.S.밀이 ‘다수의 전제’(여론의 지배)를 경고한 것도 포퓰리즘 비판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유권자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은 감정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고, 엘리트보다 상대적으로 무지하다. 정부가 이들이 주도하는 여론에 지배당하면 비합리적 정책을 추진하고, 장기적 공익을 배반하는 다수의 약탈(지대 추구)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여론의 지배라는 위험을 항상 가진다. 비유하면,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라는 중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중력을 거스르는 어떤 양력(揚力)이 필요하다.

포퓰리즘 비판이란 이런 점에서 ‘중력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양력의 부재’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대중의 그런 경향, 선거 정치에서 나타나는 그런 편향을 자제시키고 제어하는 정치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이론은 아주 오래전부터 민주주의에 내재한 포퓰리즘 경향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논의했다. 폴리비오스는 군주정, 귀족정을 민주정에 덧붙여 대중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몽테스키외는 여론의 지배에서 독립된 전문가로 구성된 사법부를, J.S.밀은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는 계몽과 엘리트에게 더 많은 투표권을 부여하는 차등 투표제를 제시했다. 

최신 정치학 논의들은 포퓰리즘 발호를 정당의 타락(레비츠키/지블렛,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경제 침체(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 등에서 찾는다. 레비츠키는 자유주의 이념과 민주주의 규범을 가진 정당이 포퓰리스트의 출현을 오랫동안 억제해왔는데, 21세기 이후 이런 기능이 매우 약해졌다고 분석한다. 미국 공화당의 국민경선제 도입과 지도부의 타락이 대표적 사례다. 뭉크는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제도에 의해 민주주의가 관리받는 체제인데, 이 자유주의 제도가 경제 침체 탓에 엉망이 됐다고 분석한다. 불평등 확대, 금융세계화 등이 포퓰리즘 성장의 토대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 비판은 지금까지 포퓰리즘을 억제해 왔던 어떤 제도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뀐 상황에 맞게 포퓰리즘을 억누를 수 있는 제도를 제안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 비판을 어떤 정치적 경향에 대한 경계로만 사용하는 건 부족하다.
 
3. 마르크스주의의 포퓰리즘 비판은 가능한가?

뭉크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포퓰리즘이란 반(反)민주주의가 아니라 반(反)자유주의다. 민주주의를 이용한 반자유주의가 포퓰리즘이다. 자유주의는 다수의 의지로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의 원천으로서 소유권과 경쟁적 시장(능력주의)을 제도로써 보장한다. 이런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것에는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대중은 그런 능력을 보유한 사람(전문가 또는 지식인)을 선출할 권리는 있지만, 그들을 지배할 권리는 없다. 대중은 선출권/파면권을 보유할 뿐 정부 운영을 담당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이런 자유주의를 거부한다. 그래서 포퓰리즘 비판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복구다.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포퓰리즘 비판은 자연스럽고 논리적 일관성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그렇지가 않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이 자유주의 복구가 아니라 비판이기 때문이다. 재산 소유권과 시장은 지양의 대상이다. 포퓰리즘 비판을 통해 자유주의를 복구한다는 프로젝트가 어색할 수밖에 없다.

둘째, PT독재론이 실은 JS밀이 이야기한 다수의 전제정 또는 극단적 포퓰리즘과 친화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PT독재론은 다수 노동자가 소수 지배계급을 수탈하며, 노동자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한다. 다원주의적 선거 경쟁이나 대의 민주주의는 부정되며, 따라서 선거 정치의 부작용 역시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PT 독재론은 ‘다수의 전제정’이 가지는 문제점, 다시 말해 포퓰리즘이 극단화됐을 때(나치즘 사례) 나타나는 문제점을 역사적으로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직접 민주주의는 다수의 ‘일반의지’를 대변하는 당의 독재로 타락했다. 다수의 소수에 대한 수탈은 반동분자 소탕이란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포퓰리즘 비판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극단화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결과 중 하나였다.

셋째, 마르크스의 변혁관 자체가 포퓰리즘 친화적 구석이 있다. 마르크스는 피지배계급의 ‘자기-해방’을 변혁이라고 지칭했다. 혁명은 다른 엘리트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모순을 지양하는 사회운동 속에서 자신을 통치 계급으로 성숙시키는 과정이란 의미다. 레닌과 마오는 이를 ‘문화혁명’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자기 해방적 운동은 “대중은 위대하다”,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항상 옳다”는 식의 편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중국 문화대혁명에서 이는 조반유리로 표현된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은 문명 파괴의 야만으로 종결됐다. 한국에서 저런 관념은 노동자주의나, 대중 시위 찬양론(촛불혁명론으로도 나아간다)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포퓰리즘 비판은 자기 모순적인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비데는 마르크스주의의 포퓰리즘 비판을 지식인과 노동자 대중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수행했는데, 사실 이는 당과 노조의 결합으로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실패한 것이었다. 비데의 이야기는 ‘자기 해방’ 운동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4. 원칙적 자유주의자 

포퓰리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할 수 있다. 자유주의 원칙과 관련된다. 이 점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현 정세가 필요로 하는 게 과연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원칙적 자유주의자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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