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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반지성주의 비판은 타당했다. 투기판에서나 볼 법한 비이성적 열광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정치를 집어삼켰으니 말이다. 시장의 균형을 감독하는 금융당국이 투기 과열을 경고할 의무가 있듯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 역시 정치의 이상 징후를 경고할 책무가 있다.

 

다만, 윤 대통령의 반지성주의 비판은 현상만 지적했지 원인을 찾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자칫 지성적 엘리트와 우매한 대중의 대결로 곡해될 여지가 있어서다. 실제로 소셜미디어에서는 취임사 낭독 직후 민중은 개돼지란 소리냐”, “너는 지성이고 우리는 반지성이냐라는 비아냥이 쏟아지기도 했다. 반지성주의 비판이 엘리트주의로 해석되면 반감만 커질 뿐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대통령이 언급은 했지만 차마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비판의 나머지 부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반지성주의를 정치의 중심에 심어 놓은 지식인들에 관해서다.

 

이 나라에서 그토록 좋은 대접을 받아온 사람들이 벌인 반역 행위”.

 

19502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매카시가 한 연설이다. 이 한마디로부터 미국 민주주의의 흑역사라 할 1950년대 빨갱이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타깃은 주로 미국 사회에 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던 지식인들이었다.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자유의 낙원이라 불렸던 미국이 어떻게 저 한마디에 단숨에 뒤집혔는지 탐구했다. 그의 결론은 반지성주의 대중문화였다. 복음주의, 기업가의 영향력, 평등주의 교육 등을 통해 대중문화에 지성과 지식인에 대한 반감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 이제 오늘날의 한국 사회로 시선을 돌려보자.

 

일제징용 대법원판결 부정하면 친일파라 불러야 마땅

 

조국 전 민정수석의 20197월 페이스북 글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조국 씨의 저 한마디로 이른바 토착왜구마녀사냥이 시작됐다. 사실 징용노동자 배상 판결은 깊게 토론해야 할 쟁점이 많았다. 법학자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외교적으로도 세심하게 앞뒤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조국 씨의 선동을 계기로 토론은 억압됐고, 비이성적 열광에 사로잡힌 반일 캠페인과 친일파 낙인찍기가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사태가 가능했을까? 호프스태더가 말한 반지성주의 문화가 한국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대중문화보단 오히려 한국의 독특한 지적 계보가 저 비이성적 열광의 배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국 씨의 친일파 선동에는 이론적 배경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널리 알린 분단체제론이다. 이 이론은 한국 근현대사를 해방 이전의 식민지 모순과 해방 이후의 분단 모순으로 단순화한다. 두 모순은 친일파에 의해 연결되고, 그들의 후예인 보수 세력의 기득권으로 공고해진다. 따라서 해방 이후 한국사의 최우선 과제는 분단체제 종식을 위해 친일파의 후예들을 청산하고, 남북 화해국면을 여는 것이다. 보수에 맞서 단결을 주장하는 진보의 담론도, 2020년 선거에서 등장한 총선은 한일전이란 구호도, 모두 이 역사 인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하지만 분단체제론은 세계경제사로 보나, 냉전사로 보나 과학적 근거가 없다. 한반도 분단을 특권화해 세계를 설명하려는 편협한 역사 인식이다. 그럼에도 일군의 지식인들이 이런 비과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대중을 비이성적 열광으로 몰아넣는다.

 

미디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시민 씨 사례는 한국적 반지성주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그가 21세기의 으뜸가는 반지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가 지성에 무조건 적의를 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한다고 분석했다. 곡학아세와 내로남불로 무장한 지식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대중의 지성 일반에 대한 혐오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중국 사상사의 대가인 쉬지린은 지식인을 지적 책임성을 갖추고 공익적 목표에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유시민 씨는 시쳇말로 사짜라 하겠다. 우선 지적 책임성이 없다. 그가 출현한 방송프로그램 PD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면 다 틀린 이야기들이다라고 말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다음으로 그는 어용을 당당하게 선언할 정도로 공익적 목표를 대놓고 포기해 버린다. 그의 지식은 애초부터 편파적이다. 예로 그는 조국 사태 당시 정경심 씨의 PC 반출을 증거보존용이라고 주장했다. 두고두고 인용될 만한 궤변이다.

 

물론 그의 행동은 일탈이 아니다. 조국 씨와 비슷한 지적 계보가 있다. 민주주의를 진보의 권력 쟁탈전으로 이해하는 독특한 민주주의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보수 청산을 민족사 과제로 이해하는 분단체제론과 한 쌍이다. 유시민 씨가 진영의 투쟁 도구로서 지식인 상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도 왜곡된 민주주의관이 전제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형성되어 재야로 불린 반독재 지식인 그룹부터 민주화 대중운동의 최전선에서 투쟁한 86세대 지식인들까지 이런 민주주의관을 공유한다.

 

예를 들면 진보 진영 지식인들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를 민주주의의 거대한 승리로 평가한다. ‘지식인선언네트워크라는 진보 성향 교수단체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촛불 정신’, ‘촛불이 묻는다등의 표현을 쓴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따져보자. 탄핵의 이유는 국정농단이었고, 국정농단의 구조적 원인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이었다. 촛불집회는 원인의 해결을 요구하지 않았고, 촛불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는 역으로 대통령 권력을 키웠다. 즉 권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갔을 뿐, 제도와 규범으로서 민주주의는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집합적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시민단체들의 상태는 지식인이 주도하는 반지성주의 운동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예로 참여연대는 보수 정부에 대해서는 권력 감시, 진보 정부에 대해서는 권력 참여를 실천했다. ‘박근혜퇴진비상행동에 참여했던 수백 개의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보수에 맞서 싸우는 게 민주주의라며 간접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편파적 지식인 역할을 지금도 한다. 숨겨진 사익이 동기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앞서 본 역사관과 민주주의관에 따른 행동이다. 참고로 민주주의 연구의 석학인 스티븐 레비츠키는 편견과 비합리적 선동으로 당파적 갈등을 극단적으로 키우는 정치가 민주주의를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주로 미국의 공화당과 그 주변 지식인들을 지적했는데, 한국의 상황을 보면, 반지성적 선동으로 갈등을 극단화 하는 역할을 진보 진영의 정당과 지식인들이 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식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지적으로 퇴보하고 도덕적으로 추락한 지식인의 타락이 반지성주의를 확산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반지성주의 비판은 막연한 문화비판이나 무례한 엘리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지식인들에 대한 지적 논쟁이어야 한다.

 

반지성주의가 확산하면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제기된 정형화된 이론 중 하나였다. 로마공화정을 분석한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폴리비오스는 민주정에서 시민이 이성을 포기할 때 폭민(暴民)이 등장해 민주정을 끝장낸다고 분석했다. 19세기 고전파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가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대중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면 언제든 다수의 전제정(tyranny of the majority)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치학자들의 최신 연구결과를 보면, 군부 독재보다도 반지성주의로 힘을 얻은 포퓰리즘이 21세기 민주주의의 위험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제대로 된 지식인 운동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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