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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대통령제의 치명적 약점으로 이중정부의 출현 가능성을 지적한다. 행정부 수반과 입법부 둘 다 선거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여서 그렇다. 국회가 ‘여소야대’로 꾸려질 때 야당이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진정한 국민의 대표인지”를 두고 둘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이중정부 상태라 하겠다. 여당과 야당이 자리를 바꿔가며 복수하는 탓에 정치적 내전은 웬만해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대통령과 국회의 상호존중 규범이 사라진 대통령제는 이중정부를 제도화하는 정부체제로 몰락하고 만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의 대통령제 정부들이 지난 30년간 저랬다.
한국의 대통령제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된 것 같다. 20대 대선 이후 여소야대 상황을 보자. ‘탄핵’이 키워드인 중앙일보 기사는 윤석열 대통령 임기 2년 2개월간 약 1천6백 건에 달한다. 박근혜 탄핵 이전에는 많아야 1년에 50건 정도였다. 그리고 윤 대통령도 거부권을 마치 당연한 듯 남발한다. 민주화 이후 7명의 대통령이 거부권을 총16회 행사했는데, 윤 대통령은 단 2년 동안 14번을 행사했다. 탄핵과 거부권은 국회와 대통령이 상대를 견제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하지만, 상호존중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면 두 권한은 총칼을 대신하는 내전 수단이 되고 만다.
나는 작년 초부터 올해 총선까지 대한민국 정치의 라틴아메리카화를 막아보겠다는 포부로 제3지대 신당 중 하나였던 ‘새로운선택’(대표 금태섭)에 힘을 보탰다. 이중정부의 내전을 끝내려면 국회와 대통령의 상호존중 규범을 다시 세우고, 더 나아가 누더기가 된 대통령제도 개혁해야 했다. 그러나 기성 정당에 이런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내전에서 비껴나 있는 온건한 야당이 새롭게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22대 총선에서 제3지대는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신당이 출현했지만, 합종연횡 갈등 외에 한국정치에 필요한 개혁 의제를 수면 위로 올리지 못했다. 기성 야당을 견제하지 못했고, ‘불량배’처럼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국회로 진출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나는 이 점이 특히 부끄럽다. 그 결과 22대 총선에서는 상호존중의 규범은커녕 클렙토크래시(도둑정치)를 상징하는 정치인들이 크게 성공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제1야당 대표는 부동산 투기꾼, 조폭 출신 기업가 등과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중이다. 제2야당 대표는 입시비리, 청탁, 직권남용 등으로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대법 판결 이후 구속될 예정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나는 제3지대 실패 원인과 한국정치가 퇴보하는 이유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22대 국회에서 더욱 격렬해질 이중정부의 내전을 막아보자는 취지로 그 이유를 짧게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 정치 상황은 2017년 탄핵 사태의 장기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은 2017년 이후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정당으로 타락했다. 시민단체 출신 야심가들, 86세대 운동권 정치인들, 한총련 출신 정치지망생들, 온라인 인플루언서 등이 ‘촛불연합’이란 이름으로 민주당에서 뭉친 탓이다. 이들의 세계관은 다원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 민주당 계보와 다르다. ‘적폐청산’이란 표어처럼 정적은 절멸시키고, 촛불집회 구호 “주권자의 명령”처럼 다수가 절대권력을 가진다고 믿는다. 정당 운영도 같다. 양당제에 적합한 포괄정당을 거부하고, ‘개딸’ 같은 팬덤 당원의 명령에 따라 ‘수박’이라 불리는 내부 비판자를 쫓아낸다. 실제로 이재명 지도부는 22대 총선 공천에서 “비명횡사”로 불린 反다원주의적 정당 운영을 구현했다.
국민의힘 계열 보수 정당은 2017년 이후 무능과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양당제에서 집권 가능한 정당은 내부에서 다양한 정치적 지향과 계보가 경쟁을 벌이며 중도층까지 포섭하는 포괄정당이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힘을 보면 내부에 지향과 계보라는 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2017년 탄핵 사태 이후 주요 정치인들이 뿌리째 뽑혀나간 후과이다. 22대 총선만 봐도 보수 정당 역사와 별 관계가 없는 검사 출신 선후배가 대통령과 당대표로 전면에 나섰다. 수십 년간 정치를 한 다선 의원들이 정치 초보들에게 기대어 있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한편, 타락한 진보에 대한 보수의 무기력한 대응은 시대 조건에 따라 진보나 보수를 선택하는 ‘중도층’의 성격을 대폭 바꿔놓았다. 진보와 보수는 더 이상 경쟁력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 유권자의 가슴에 남는 것은 과거의 정념인 원망과 복수다. 20대 대선에서 중도 성향 유권자 상당수가 “버림받은 전직 검찰총장의 복수심”에 자신의 한 표를 주는 것으로 문재인에 대한 원망을 표현했다. 22대 총선에서는 윤석열에 대한 원망을 그에게 수사받고 나락으로 떨어진 전직 법무부장관을 지지하는 것으로 쏟아냈다.
더군다나 소선거구제 하의 양당제는 이런 ‘복수의 악순환’을 부추긴다. 최다 득표자만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는 기본 성격이 ‘현직 심판’이다. 양당의 선거 과점을 제도화한다. 무능과 타락의 대결이라도 마찬가지다. 합리적 평가 대신 원망과 복수심이 심판의 근거를 대신할 뿐이다. 심지어 한 정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정당으로 타락해도 과점 시스템이 유지된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가 선거 시스템에서 제도적 인센티브와 양당제 과점을 누리는 공화당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그의 분석이 한국에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탄핵 이후 정치 지형에서 제3지대는 생존이 더욱 어려워졌다. 2012년, 2016년 총선에서는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한 제3당이 등장했지만, 2020년 이후부터는 6석이 최대치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바, 선거 레이스가 시작되면 유권자는 원망과 분노로 홍해처럼 갈라진다. 어지간한 정당으로는 건널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제3지대의 문제의식까지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락한 민주당이 주도하는 이중정부를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프랑스는 20세기 말에 이중정부(이원집정제의 야당 총리)를 자주 겪으며 세계화 시대에 개혁을 하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2000년대 내내 독일에 뒤처졌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정부는 대통령과 국회가 극한의 대치를 하다가 각자 정부를 꾸렸고, 결국 히틀러에게 쿠데타 기회를 내주며 몰락했다. 이렇게 역사의 갈림길에서 이중정부는 후대에 큰 피해를 남긴다.
나는 가끔 2017년 탄핵 사태를 ‘되돌리는’ 정치를 상상한다. 탄핵 사태의 장기 부작용을 치료하려면 그 반대 결과를 만드는 정치가 필요한 것 같아서다. 만약 야당이 대통령 탄핵을 정치 일정에 정말로 올린다면, 국민이 그때와 다른 방법으로 정치를 바꿔보는 것이다. 차기 대권 주자의 욕망을 투사하는 탄핵 대신 ‘대통령제’를 바꾸는 의원내각제 개헌! 사실 선진국 표준이 의원내각제인 까닭이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라스 노스는 제도 선진화의 핵심으로 개방성을 통한 위기 관리의 안전성을 꼽는다. 이원정부를 방지하며 동시에 안정적으로 행정 수반과 의회 구성을 바꿀 수 있다. 아직은 우리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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