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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에서 30대를 보냈다. 인생의 기초를 세우던 때여서 그런가. 성남의 풍경은 지금도 자주 생각난다.

성남은 정말 풍경의 콘트라스트가 강한 도시였다. 북쪽에 있는 절반은 산업화 초기 서울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산 산동네고, 남쪽에 있는 절반은 천당 밑에 만든 도시라는 분당이어서 그런 듯하다.

북쪽 성남에는 반지하 집이 있는 연립주택과 옹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들이 가파른 산 위에 빽빽하게 모여 있다. 좁은 골목길에는 주민들이 신기에 가까운 실력으로 이중 삼중 승용차들을 주차해 놓았고, 주택과 차들 사이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전력선·케이블티브이선·인터넷선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반면 남쪽 성남은 평평했다. 도로는 반듯했고 주차장은 넉넉했다. 전선들은 지하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북쪽에 있다가 남쪽으로 가면 단조롭고 심심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풍경의 느낌과 집값의 변동이 반대란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성남의 특징이었다. 가파른 산 위의 북쪽은 평평하고 지루했으나, 평평한 땅 위의 남쪽은 가파르고 ‘익사이팅’했다.

성남시 풍경의 강한 콘트라스트는 두 지역의 경계에서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를 만들기도 했다. 남한산성 쪽에서 성남대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가다 보면, 도로 주변이 갑자기 횡해지는 지역이 나타난다. 모란역에서 야탑역까지 이어지는 수 킬로미터의 구간으로, 이곳에는 좀 뜬금없이 논밭과 대형 화원이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반듯한 10차선 도로 위에 고층 아파트가 일렬로 나오는데, 여기부터가 남쪽 성남인 분당이다. 나는 이 수 킬로미터의 구간을 농반진반으로 비무장지대(DMZ)라 불렀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처럼 남북이 서로 침범하면 안 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말이다.

성남의 DMZ는 풍경만이 아니라 기능도 놀라웠다. 우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로 이어지는 IC가 여기에 있다. 이 도로는 경부고속도로와도 바로 연결된다. 서울과 지방에서 고속도로로 성남에 오는 사람은 성남 DMZ에서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이곳은 여러 의미의 성남 남북의 분기점이었다. 서울에서 오는 광역버스들은 모두가 여기서 남쪽을 향했다. 그리고 외부에서 오는 자본과 사람도 주로 남쪽으로 향했다.

성남시청도 여기에 있었다. 내가 성남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성남시청은 북쪽 성남의 한복판에 있었지만, 2009년에 이전했다. 새 청사를 볼 때마다 참으로 절묘하게 건물을 지었다고 감탄했다. 행정구역으로는 북쪽 성남의 맨 끝에 있었고, 시청 정문이 바라보는 곳은 남쪽 성남인 분당이어서 그랬다. 시 당국이 몸은 북쪽에 있어도 마음만은 남쪽에 있다는 걸 건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나는 요즘 연일 뉴스에 나오는 판교 신도시 개발 과정도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성남에 올 때만 해도 허허벌판에 땅을 파고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때 즈음에는 판교가 분당보다 뜨거운 곳이 돼 있었다. 같은 시기 내가 살던 북쪽 성남에는 큰 개발은 없었다. 지방의료원 하나 만드는 걸로도 자금 문제를 가지고 십수 년 동안 애를 먹고 있었다. 판교에는 뚝딱뚝딱 뭔가 짓더니 수조 원에 달하는 부동산 시장이 정말로 ‘짠’하고 만들어졌다. 유명한 IT기업들이 몰려 왔고, 백화점이 문을 열었고, 평당 수천만 원의 아파트가 분양됐다. 와. 이런 게 부동산 개발이구나. 돈을 싸서 들고 온다는 게 이런 거구나. 판교를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요즘 뉴스에서 하도 성남 이야기가 많아서 떠올려 봤다. 그런데 대장동에서 벌어진 일은 그때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 뭐랄까. 내가 느낀 성남은 그럴 만한 도시였던 것 같다. 국민경제 성장에서 배제됐던 주민들이 있었고, 성장의 혜택을 자신이 기여한 몫보다 더 크게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 있었고, 분배는 사후에도 조정되지 않았다. 지대는 교통·자본·인구를 모두 잡아당겨 더 큰 지대를 낳았고, 더 큰 지대는 교통·자본·인구를 더 많이 독점하는 힘이었다.

사실 지대 추구는 인류와 함께한 오래된 행동 양식이다. 지대란 지구가 만든 자연을 소유해서 얻는 소득이나, 생산에 기여한 몫 이상으로 얻는 소득을 뜻한다. 전자는 소유권의 보호로, 후자는 시장의 불완전 경쟁으로 만들어진다. 어쨌건 지대는 불로소득이고 누군가의 소득을 빼앗아 제 것으로 삼는 제로섬 게임이다. 농업사회에서부터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지대는 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항상 추구했던 바였다.

이러한 지대는 계급사회의 가장 분명한 지표다. 농업사회의 지주는 폭력을 사용해 소작농에게서 생산물의 상당 부분을 소작료(지대)로 가져갔다. 지대의 크기에 어떤 심오한 법칙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안 내면 때렸고, 도망치면 죽였다. 농업사회의 고대문명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8천년 가까이 인류는 이런 식으로 살았다.

근대 이후에는 정부가 폭력을 독점해 사적 폭력을 억제했다. 국민은 민주주의로 정부를 통제했다. 하지만 지주의 지대 청구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헌법에서 소유권은 철칙으로 보호를 받았다. 이는 국민주권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권리였다. 시장의 불완전 경쟁으로 인한 지대는 규제되긴 했지만, 정적인 규제는 동적인 지대 추구 행위를 완전히 막지 못했다. 심지어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지대 추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부동산 시장을 보면 왜 그런지 이해가 될 것이다.

봉건시대의 폭력과 지대는 근대 이후 다소 완화하긴 했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민주주의나 경제가 불안정해지면 전근대적 지대 추구와 폭력이 재등장하기도 했다. 독재정부 시기의 도시개발에서 철거깡패가 활약했던 사례, 신도시에서 투기와 사기가 기승을 부렸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인류는 폭력과 지대를 통제하는 방법을 개발하며 진보했다. 하지만 역사가 매번 자동으로 진보하는 건 아니다.

대선 후보와 관련한 최근의 성남 소식에는 지대, 폭력, 규제의 실패 등이 따라온다. 참으로 전형적이고 원초적이다. 진실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이 상서롭지 않다. 한국 사회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게 무얼지 모두 고민해 볼 때다.

(2021년 10월, 매일노동뉴스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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