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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에 노동개혁이라니! 역대 최약체인 정부가 외환위기 급의 경제적 불안정성 속에서 보수 세력이 손만 댔다 하면 곤욕을 치르는 노동개혁에 나선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안을 몇 달 후 발표한다. 환율과 물가는 그때도 당연히 불안정할 것이다.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민주노총은 정부 출범 때부터 일찌감치 투쟁할 결심을 굳혔다. 정부와 노동계가 충돌해 불꽃이 일면 야당은 기름을 끼얹을 것이다. 작은 충격에도 금융시장이 요동을 친다. , 어떨까? 윤 대통령은 이 상황에서도 노동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까? () 민주당 지지 세력은 대통령을 내버려 둘까?

 

최근 파업 이슈가 불거진 미국과 영국 사례가 시사적이다. 지난주 미국에서는 철도 파업이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을 장식했었다. 물가 상승이 가속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서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중재에 나섰다. 개별 사업장 파업에 대통령까지 나서는 건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좋은 방법이라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인플레이션 위기가 다급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영국에서는 파운드화가 폭락한 가운데 철도 노조가 집권당 전당대회 날에 맞춰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IMF 구제금융까지 갔던 1970년대 후반과 상황이 비슷하다. 감세와 노동법 개혁을 약속한 트러스 총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너에 바짝 몰린 상태다. 윤 대통령이 노동개혁을 단행하려면 미국이나 영국보다 힘든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윤 대통령 처지는 저들보다 훨씬 나쁘다.

 

노동개혁은 절박하다. 한국의 사회적 갈등은 양극화된 노동시장의 책임이 크다. 한국경제의 생산성 둔화는 비효율적인 노동시장 제도가 원인 중 하나다. 전대미문의 인구 고령화 속도를 고려할 때 노동시장 개혁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 되면 하고, 아니면 그만 둘 개혁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노동개혁은 한국사회에서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영역이라, 막상 시작하면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보자. 이 원칙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실제 개혁에 돌입하면 그 해석은 각양각색으로 나뉜다.

 

노동계의 전통적 생각은 동일노동이 동일사업장이란 것이다. 같은 일터에서 일하면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정규직화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에 취업한 청년들은 생각이 다르다. 동일노동이란 동일시험이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불공정하다. 기업의 생각은 또 다르다. 동일노동이란 경쟁적 시장에서 같은 가격으로 평가받는 노동이다. 미국처럼 고용과 해고가 수요·공급에 따라 자유롭게 이뤄지는 게 최선이다. 약간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동일노동에 관한 입장 차이는 이렇다.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직 정규직화 철폐, 정규직 철폐. 정말 서로 상극이다.

 

동일임금도 컨센서스가 없긴 마찬가지다. 노동계는 동일임금을 동일근속임금’(호봉제)으로 해석한다. 1980년대 말 생산직 노동자의 요구는 사무직과 같은 호봉제를 적용하라는 것이었고, 오늘날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의미 역시 정규직 호봉 테이블의 쟁취이다. 그런데 기업에는 동일임금이 동일생산성임금이어야 한다. 호봉제는 개혁 대상이다. 한편 동일임금을 둘러싼 논란에는 전혀 다른 지형도 존재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호봉제는 전체 기업의 14%만 적용하고 있다. 임금지급 체계가 아예 없는 기업이 61%나 된다. 호봉제를 지키겠다는 사람이나 없애자는 사람이나 실은 소수다. 관심 없는 사람이 더 많다.

 

동일노동 동일임금단 여덟 자를 두고도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부딪힌다. 노동개혁의 다른 과제까지 고려하면 합의는 더 까마득해 보인다. 임금 격차의 원인 중 하나인 대기업·중소기업 생산성 격차, 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 사이의 상충관계, 여성의 출산·육아 불이익 등등. 하나 하나가 엄청난 갈등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참고로 문재인 정부는 영리하게도(?) 개혁은 미루고 구호만외쳤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진심을 다했다며 요란을 떨었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1632.8%에서 202138.4%로 증가했다. 임금체계 개혁은 말만 꺼내놓고 방치해 놓았고, 저임금 계층을 위한다며 (후에 고용 역풍이 불어닥친)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단행했다.

 

나는 윤 정부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2024년 총선 전까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정책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둘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동맹구축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개혁의 성패는 사실 정책의 논리적 정합성보다도 동맹의 구축 방법에 달려있다. 윤 정부는 이 점에 관해 너무 무관심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석학 더글라스 노스는 모든 질서는 지대를 공유하는(rent sharing) 엘리트들의 동맹에 기초한다고 이야기한다.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그 동맹을 약화할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국에서는 동맹을 교체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군부 쿠데타가 이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검토할 대상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개방적 질서를 요구하는 개혁 동맹이 기존 엘리트들에게 변화의 유인(incentive)을 제공하며 평화롭게 변화를 끌어 낸다.

 

한국 노동시장에서 지대 동맹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상층에 위치한 집단들 사이에 있다. 개방적 질서의 필요성은 하층에 위치한 집단들에게 절실하다. 윤 정부는 이들과 어떻게 동맹을 맺을지 고민해야 한다. 극우파 인사나 쌍팔년도운동권을 앞세우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시장 지대 동맹의 엘리트들에게 어떤 유인을 제공할 수 있을지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얻을 건 하나도 없다. 규합과 타협, 우리는 이런 것을 보통 정치라고 부른다. 윤 대통령은 임금체계와 노동시간 유연화같은 당위만 내세울 게 아니라 노동개혁을 위한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노동개혁은 효과가 한참 후에 나오기 때문에 효능감이 적다. 하지만 갈등이 폭발하기 때문에 피로감은 크다. 노동개혁은 대통령의 살 자리가 아니라 죽을 자리일지도 모른다. 총선 뒤로 미루던지, 아니면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 각오로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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