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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돼 문재명(문재인·이재명) 10년을 막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취임 100일도 되기 전에 윤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 주저앉았다. 여당은 이 와중에도 내분으로 무기력하다. 더군다나 민주당 지도부 선거에서는 대표에 이재명, 최고위원에 정청래, 고민정 의원 등이 유력하다. 이들이 누구인가? 민주당에서도 초강성으로 평가받는 정치인들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회복되지 않으면, 180석 야당 민주당은 5년 후 대선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원내대표가 국회연설에서 공공연히 탄핵을 거론하는 게 현재의 민주당 정서다.
참담하다. 포퓰리스트 정부가 이어지면 대한민국에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그런데, 반년도 되지 않아 도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훗날 윤 정부가 문재명 10년의 짧은 에피소드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까지 든다.
윤 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이 된 이유, 즉 국민이 그에게 부여한 소임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따져보면 친윤석열 유권자 집단은 애당초 없었다. 반문재명 유권자 집단들이 여기저기 있었을 뿐이다. “유능한 반문재명 정부”가 윤 정부 지지율의 본질이란 뜻이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펼칠 포퓰리즘 정책을 방지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문재인 정부가 한국사회에 남긴 최악의 유산은 단연코 대외관계라고 생각한다. 최근 중국이 한국 정부가 사드 ’3불1한‘을 선언했다고 주장하는 일도 있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문 정부의 대중 저자세 외교가 어디까지 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하겠다. 문 정부는 분단이 민족의 최대 현안이고, 친일잔재가 그 원인이라는 재야 또는 386세대 역사관에 충실했다. 그 결과가 친북(親北)·반일(反日) 외교, 그리고 이와 연동된 연중(聯中)·비미(非美) 외교(중국에 대한 저자세와 미국에 대한 거리두기)였다. 한국 외교는 우리가 모두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민족적 생사와 직결된다. 문 정부는 역사적 망상을 근거로 민족의 생사를 걸고 도박을 벌인 셈이었다.
이 시기 한국이 주목해야 하는 동아시아 상황은 중국의 변화였다. 시진핑이 내세운 ‘중국몽’(2013년)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2017년)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 노선을 약화하며, 마오쩌둥 사후 억압되어 있던 스탈린주의를 복권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는 지도자의 독재와 반동의 숙청, 그리고 자국의 팽창을 인류의 해방으로 간주한다. 시진핑의 영구 집권 시도, 홍콩에서의 대대적 숙청, 대만 침공 훈련 등은 어쩌다 발생한 일탈이 아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세계 질서가 민주주의 동맹과 독재정부의 대결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패권을 위한 고리타분한 명분이 아니었다. 미중 갈등은 약육강식의 패권 대결이 아니라, 인류가 지향할 가치를 둘러싼 대결이다.
이런 조건에서 문 정부는 대북정책을 이유로 중국 친화적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핵심인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를 계기로 군사협력 분야로 갈등을 확대했다. 문 정부의 외교 정책은 결과적으로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지도 못했으면서 중국발 동아시아 위기만 확대해 놓은 꼴이었다. 세계 질서의 안정과 민주주의 증진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
윤 정부는 한미동맹 재건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내세우며 문 정부 외교 전략과 단절을 선언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와 반도체 동맹(칩4)에 참여할 뜻을 밝혔고,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도 정상화하고 있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윤 정부 행보를 보면 여전히 문 정부의 무거운 유산 아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단적인 사례가 최근 있었던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홀대 논란이었다. 대통령의 행동은 누가 봐도 중국 눈치를 본 것이었다. 윤 정부는 문 정부가 마음껏 누린 '상황의 지대(rent of situation)‘, 즉 지정학적 상황을 이용해 미국의 안보와 중국의 경제를 함께 취하는 전략을 단번에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 정부가 위험한 외교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던 배경에도 저 상황의 지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상황의 지대는 지금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속이 붙었다. 이제 미국은 중국을 세계화의 동반자가 아니라 경제·군사 안보와 연계한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다. 중국의 행동에 따라 미국도 맞대응 한다는 전략이다. 윤 정부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중국과 밀접하게 교류하는 거대한 민간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한데, 문 정부 5년간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윤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좁다.
한일 관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상황의 지대가 사라질수록 그에 비례해 가치에 기반한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핵심은 한일 관계 복구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핵심인 일본을 빼고, 한미동맹을 발전시키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헤집어 놓은 반일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다. 일본기업 자산 현금화를 막으며 징용노동자 소송 해결책을 찾는 것도 외교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어려운 숙제다.
나는 윤 정부가 “유능한 반문재명 정부”로 국민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여기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운이 걸려 있는 쟁점에서 극명하게 전·현직 대통령의 차이, 여당과 야당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국민들도 어떤 식으로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대한민국 미래를 두고 논쟁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동아시아 정세를 국민에게 충분히 알리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당연히 야당뿐만이 아니라, 진보 시민단체들과도 충돌할 수 있다. 국민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갈등이다.
물론 윤 정부가 지금처럼 행동하면 국민적 동의를 얻기 힘들 것이다. 문 정부 취임 100일을 떠올려보자. 주 단위 계획까지 만들어 군사작전을 하듯 정책을 밀어붙였고, 정부와 여당만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소셜미디어까지 동원해 여론을 조성했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현재의 윤 정부와 국민의힘은 천하태평이다. 방향의 명확성도, 개혁의 절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변화가 절실하다.
윤 정부가 이 논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플랜B가 필요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와 사뭇 다른 쟁점이지만, 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개헌이 그 방안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수명이 다했다는 점은 이명박 구속, 박근혜 탄핵, 문재인의 포퓰리즘 정부, 윤석열 정부의 이례적 낮은 지지율 등으로 충분히 증명됐다고 본다. 윤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대폭 줄이면서 개헌의 관리자를 자처할 수 있다. 낮은 지지율이 계속되면, 어차피 2024년 총선 전까지 국정 동력이 확보되기 어렵다. 사나운 야당이 기회만 잡으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개헌도 문재인의 유산을 청산하는 한 가지 방법이긴 하다. 문 정부의 부정적 유산 상당수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과 무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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