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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유주의와 그 불만>

개용이 2023. 3. 23. 14:31
좌파, 사회주의자. 나는 정치 성향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런 단어로 답하는 게 여전히 편하다. 20여 년 이런 정체성으로 살았으니 당연하다고 해야할까. 그 반대편의 단어들, 우파나 자유주의자는 꿈에서도 내 정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나는 20세기적 의미의 좌파나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관해서는 우파 반공주의자 이상으로 비판적이다. 21세기 좌파 주류는 포퓰리즘에 포획되었다고 판단한다. 솔직히 지금 내 입장은 윤석열/국민의힘보다 이재명/민주당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난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라 자신을 표현해야 적당할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최신작 <자유주의와 그 불만>을 소개해 본다. 나는 이 책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가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현대화의 기본 원칙. 나는 고전적(classical)보다는 원칙적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고전적이란 번역어가 낡은 것이란 오해를 낳는 경향이 있어서다.
 
어쨌든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개인주의와 보편주의, 그리고 중도(moderate)가 핵심이다. 우리가 현대라 부르는 시대의 근본 원리라 할 수도 있겠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 위기는 이런 원칙적 자유주의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서 발생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유주의의 내재적 공백을 채워넣지 못하면서, 위기가 닥치자 한 쪽에서는 자유주의를 아예 부정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유주의의 일부 측면만 극단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상황이 더 엉망이 되었다. 후자의 대표적 사례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시장 근본주의다. 전자의 사례는 포퓰리즘, 민족주의, 정체성의 정치가 대표적이다. 자유주의의 내적 결함이 자유주의의 위기를 심화했다.
 
나는 후쿠야마의 분석에 대부분 동의한다. 역사의 종말이니 하면서 사회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그를 좋게 평가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그가 고전적 자유주의라 부른 원칙들은 사실 고전적(소련 이전의) 사회주의의 지향이기도 했다.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교조화된 PT독재론이나 국유화 경제는 사회주의론의 결함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세계에서 형성된 이 결함이 소련을 거쳐 오늘날의 푸틴 러시아, 시진핑 중국 정부 같은 괴물을 만들어냈다. 자유주의의 결함을 해결하려 출발한 사상이 자유주의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었다. 후쿠야마의 고전적 자유주의, 내가 원칙적 자유주의라 부르는 해독제가 오늘날의 좌파, 사회주의자에게도 필요하다.
 
시급한 과제다. 시장의 불안정성이 계속 심화하는 가운데, 포퓰리즘-민족주의-정체성의정치 같은 현대를 해체하는 운동이 세계를 집어삼킬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공백과 좌파의 결함이 미국에선 극우 포퓰리즘으로, 한국에선 민주당 포퓰리즘으로 만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삐끗하면, 곧바로 1930년대 유럽으로 가는 것이다. 오늘날 필요한 건 원칙적 자유주의를 중심에 둔, 반포퓰리즘 정치 동맹일 수 있다. 후쿠야마의 책이 던지는 제안 역시 이런 것이라도 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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