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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총선의 최대 쟁점 중 하나는 선거제다. 국회의원 뽑는 선거를 하면서 국회의원을 어떻게 뽑을지 논쟁하는 꼴이다. 규칙이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경기 시간만큼 말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동네 꼬마들 축구 경기를 보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후보 등록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도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47석이 걸린 비례대표를 어떻게 선출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선거제가 총선 쟁점으로 부각된 이유가 무엇일까? 바람직한 선거제가 무엇이길래 지난 총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것일까?

 

논란의 근본 원인은 2019년 선거법 농단

 

22대 총선의 선거제 논쟁은 비례대표 선출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한쪽은 병립형으로 불리는 2019년 선거법 개정 이전으로의 복귀를, 다른 한쪽은 연동형으로 불리는 현행 선거법의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병립형연동형 논쟁 이전에 따져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연동형 비례제를 채택한 현행 선거법의 정당성 여부다. 20194,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제1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해 그해 12월 말 국회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나는 이런 방식의 선거법 개정은 선거법 농단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제의 타당성 여부와 별개로, 선거법을 2019년 이전으로 되돌려야 선거제 관련 토론이 정상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선거법은 선거의 경쟁 규칙이다. 경쟁 규칙에서는 공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공정성의 전제 조건은 예측 가능성이다. 경쟁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경쟁 규칙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유로 규칙을 급하게 바꿀 수도 있다. 다만 이럴 경우, 참가자 사이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불시에 규칙을 변경하면, 그 내용이 뭐든 간에 경쟁은 불공정하다. 경쟁에서 패한 쪽이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선거법 개정 역사를 보면, 이런 규범이 2019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지켜졌다. 198813대 총선에서는 독재 시절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네 당이 치열한 공방 끝에 합의해서 처리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 남아있었음에도, 어쨌든 네 정당은 합의할 수 있는 만큼만 선거법을 개정했다. 이후에도 30여 년간 총선 때마다 크고 작은 선거법 개정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1당이, 2당을 배제한 채로 선거법을 개정한 적은 없었다. 선거 구도가 불리할 때마다 당리당략에 따른 선거법 개정론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거가 임박해 제1야당의 동의 없이 선거법을 개정할 수는 없다는 원칙론이 목소리를 키웠다.

 

이러한 선거법 규범을 민주당이 2019년에 짓밟았다. 1야당이 농성을 단행할 정도로 극렬히 반대했음에도, 민주당은 정의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과 함께 힘으로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민주주의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게임 규칙의 일방적 변경21세기에 유행하는 민주주의 규범 파괴의 대표적 유형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9년 선거법 개정은 21세기형 민주주의 파괴의 전형적 사례라 하겠다.

 

요컨대, 선거법 개정 규범부터 바로 세워야 선거제 토론도 가능하다. 병립형연동형 토론도 민주주의 강화라는 전제 위에서만 유효하다.

 

위성정당을 피할 수 없는 한국형 연동형 비례제

 

현 연동형 비례제는 내용도 문제다. 연동형 비례제의 기본 취지는 전체 의석이 정당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인데, 현재의 지역구/비례 의석 배분 구조에서는 이런 취지를 살릴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보자. 연동형의 기본 취지대로라면, 300석 국회에서 A정당이 30%를 득표할 경우 의석수를 90석 보장해야 한다. A정당이 최다득표자만 뽑는 소선거구제 지역구에서 50석을 얻었다면, 40석을 비례대표로 채워줘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동형이 작동하려면 중요한 조건이 하나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지역구 의석만큼 정당 득표율로 확보할 수 있는 비례 의석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동형 원조인 독일에서는 지역구 의석수와 비례대표 의석수가 같다. 총의석 300석을 가정하면, 150석이 지역구, 150석이 비례다. A정당이 정당 득표율 30%(90석 보장)를 얻었다면, 지역구의 절반인 75석을 차지해도 비례로 15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비례가 지역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다. 지역구와 비례가 각각 253, 47석이다. A정당이 지역구 절반인 126석을 얻을 경우 정당 득표율 40%(120석 보장)를 얻어도 비례를 단 한 석도 얻지 못한다.

 

현 연동형 비례제는 적은 비례대표 의석을 가지고 지역구와 연동하다 보니, 비례성 보완이 아니라 거대 양당 축출 제도로 작동한다. 예로 지역구 100석에, 정당 득표율 30%를 얻는 B정당은 비례가 0석이고, 지역구 10석에, 정당 득표율 20%를 얻는 C정당은 비례가 25석이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지역구에서 얻는 의석수를 감안하면, 현행 선거제는 두 정당을 비례대표에서 사실상 축출한다.

 

두 거대 정당이 비례에서 축출당하지 않기 위해 위성정당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하게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법을 위반하지 않고 의석수를 늘릴 수 있는데 당 지도부가 이를 포기한다면, 일종의 배임죄다. 소수 정당이 도덕적으로 호소해봤자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자들 입장에선 당신들의 정당 투표는 모두 사표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부당한 요구로 들릴 뿐이다.

 

소선거구제든, 비례대표제든, 또는 둘을 적당한 결합한 혼합 선거제든, 어떤 선거제가 절대적으로 낫다는 기준은 없다. 책임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의 저자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 관념에 구애받지 말고 좋은 공공 정책에 초점을 두고 선거제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표의 비례성이 높아질 때 국민 모두를 위한 정책이 더 잘 입안되고 실현되는가라고 반문해 보라는 것이다.

 

따져보면 21대 총선에서 확인한 연동형 비례제는 공공 정책 측면에서는 완전한 실패였다. 연동형으로 국회에 진입한 의원들만 봐도 그렇다. 윤미향, 양이원영, 김홍걸, 최강욱, 김의겸, 조수진 의원 등등 각종 논란의 중심에 섰던 상당수가 연동형 비례로 국회에 진입한 의원들이었다.

 

22대 총선에서 연동형 유지를 주장하는 세력도 사정은 비슷하다. 위성정당 출신인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연동형 제도를 이용해 윤석열 심판연합정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연합정당의 구성원 중 하나인 사회민주당은 아예 윤석열 탄핵이 슬로건이다. 이들은 민생, 국민통합 같은 공공 정책이 아니라 진영 정치의 돌격대를 만들기 위해 연동형 제도를 이용한다.

 

선거제 이전에 정당의 문제

 

우리나라 진보 진영은 비례제를 좋은 선거제의 표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선진국의 선거제는 표준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헌정 국가인 영국과 미국은 전형적 소선거구제로 국회를 구성한다. 승자독식이니만큼 현역과 도전자 구도, 즉 완고한 양당 체제가 구축되어 있다. 프랑스의 경우 소선거구제에 결선투표제를 결합해 소수 정당이 현역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혔고, 독일의 경우 소선거구제에 연동형 비례제를 더해 표의 비례성을 보완했다. 일본은 양원이 각기 다른 선거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중의원은 소선거구제와 권역별 병립형 비례제를, 참의원은 중대선거구제와 전국구 비례제를 채택하고 있다.

 

사회적 타협으로 복지 국가를 건설한 북유럽 나라들은 완전 비례제로 국회를 구성한다. 덴마크의 경우 의석 과반을 차지하는 거대 정당이 없어도 10여 개 원내 정당이 별 탈 없이 연합정부를 구성한다. 스웨덴의 경우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하고 가끔 나머지 정당들이 연합해 집권하는 1.5당 체제다. 북유럽에서 잘 작동하는 비례제가 남미에서는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브라질은 강력한 대통령제하에서 비례대표로 선출된 수십 개의 정당이 의회에 난립하는데, 대통령은 입법할 때마다 여러 정당과 의원을 포획하기 위해 이권을 거래해야 한다.

 

선거제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현실 정치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건 선거제의 플레이어들, 즉 정당이다.

 

레비츠키에 따르면 규율 잡힌 정당을 통해 유지되는 규범이 공정하고 공익적인 선거의 전제 조건이다. 예로 어떤 선거제를 채택하더라도 다수당이 게리맨더링으로 선거구를 멋대로 조정하면 의석수 왜곡을 막을 방법이 없다. 동남아시아와 동유럽의 다수당들은 이런 식으로 합법적으로 독재를 한다. 최근 미국 공화당은 자신이 다수당인 주의회에서 유색인종의 유권자 자격을 제한하는 꼼수 입법을 통과시키고 있다. 법을 만드는 정당이 선거 관련 법을 멋대로 개정하기 시작하면 공정한 선거는 어떤 선거제에서도 불가능하다.

 

로젠블루스는 크고 강한 정당이 있어야 선거제 개혁도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크다는 건 중도를 포괄하는 정당, 양극단으로 쏠리지 않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당이란 의미다. 강하다는 건 여론 변화에 쏠리지 않고 당이 목표로 하는 장기적 과제를 추구할 뚝심이 있다는 뜻이다. 크고 강한 정당이란, 공공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할 실력과 의지를 갖춘 정당이다.

 

이탈리아는 크고 강한 정당의 부재가 선거제보다 중요한 문제란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 이탈리아에서는 1993년에 50년간 유지되던 비례제를 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로 바꿨고, 2005년에 도로 비례제로 돌아갔다가 2018년에 비례제와 다수대표제를 혼합했다. 25년간 해볼 수 있는 선거제는 다 해본 셈이다. 그럼에도 서유럽 최악의 포퓰리즘 정치로 악명을 떨친다. 이유가 뭘까? 전통적으로 크고 강했던 정당들이 1990년대 초 마니 풀리테부패로 몰락한 이후, 모든 정당이 작고 약한 정당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비례제든 소선거구제든, 정당들은 극단적 주장으로 열성 지지자를 모았고, 장기적 과제 대신 단기적 이권에 집착했다. 선거제가 변할 때마다 선거제에 맞춘 포퓰리스트 정당이 출현해 경쟁에서 승리했다.

 

선거제가 아니라, 정당이 문제란 지적은 우리나라에도 시사점을 준다. 22대 총선에서 선거제가 이렇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선거제의 논리적 타당성 이전에 민주당의 규범적 타락, 극단화 탓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5년 전에 기존 규범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선거법을 개정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부작용을 방치해두다가 선거를 앞두고 당리당략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선거법을 바꿔보려 꼼수를 쓰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친명또는 개딸로 불리는 극단적 팬덤 정치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 이재명 대표가 연동형 보완을 약속할 때는 연동형이 선진국 선거제라고 선동하더니, 이 대표가 병립형으로 회귀할 뜻을 내비치자, 연동형을 주장하는 의원을 저격한다.

 

결론

 

정리해보자. 선거제 논란은 2019년 선거법 농단에서 시작한다.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이전 선거제인 병립형 비례제에서 선거제 개혁을 다시 논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22대 총선은 그렇게 치러야 순리에 맞다. 심지어 현행 연동형 비례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중이 맞지 않아 비례성 취지를 실현하지 못한다. 위성정당의 딜레마를 구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선거제 논란에 가려져 있지만, 한국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건 오히려 정당이다. 기존 거대 정당이 민주주의 규범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제가 뭐든 이래서는 공정한 선거를 치를 수 없다. 더군다나 양당 체제의 한 축인 민주당이 더 작고, 더 약한 정당으로 퇴화 중이다. 작고 약한 정당은 포퓰리즘에 취약하다. 인구 소멸, 빈부격차 확대, 신냉전 안보위기, 탈탄소 전환 같은 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공공 정책을 만들지 못한다.

 

선거제 논란은 한국에서 정당의 퇴화를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선거제를 바꿔 소수 정당이 국회에 많이 진입하면 정치가 크게 바뀔 것처럼 이야기하니 말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봐도, 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이는 근거가 없다. 다당제 탓에 정치적 혼란이 커진 사례가 많다. 강한 대통령과 작고 약한 정당들의 난립이 특징인 남미 나라들이 대표적 사례다.

 

민주주의 규범으로 무장하고, 크고 강한 정당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당이 필요한 때이다. 선거제 논의 역시 이런 정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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